평화의 댐 ‘碑木’…명치끝이 ‘짜르르’

비목공원 유래 읽으며 ‘울컥’, ‘아, 그 가사가 여기서 나왔구나’

임춘신 | 기사입력 2014/08/03 [08:32]

평화의 댐 ‘碑木’…명치끝이 ‘짜르르’

비목공원 유래 읽으며 ‘울컥’, ‘아, 그 가사가 여기서 나왔구나’

임춘신 | 입력 : 2014/08/03 [08:32]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 평화의 댐     © 임춘신

 

 

평화의 댐 비목공원에서 서울까지 오는 4시간동안 부르고 또 부른 노래다. 부를 때 마다 가슴 끝이 아려왔다. 언젠가 TV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좋아하는 노래로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그때 나도 애잔하고 멋지다며 별 생각 없이 흥얼거렸던 가곡이었다. 그리고는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댐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깨끗하고 조용하다. 북한강 하류 팔당댐에서 최상류 안남 댐까지 하나씩 가보자며 매주 나서는 길이다. 강원도 화천군 비수구미마을로 가는 입구에 오자 평화의 댐까지 ‘아흔 아홉 구비길‘ 초록색 푯말이 보였다.

 

집이 네 채 밖에 없는 청정지역으로 최근 유명세를 탄 비수구미마을로 가는 트래킹 객들이 화려한 등산복 차림으로 버스에서 우르르 내렸다. 왁자지껄 떠들썩한 소리들이 초록빛 산에 울려 퍼지자 고요하던 산에 생기가 돌았다.

 

자동차로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 재를 넘었다. ‘파아란’ 하늘과 초록빛 나무 외엔 아무도 없다. 오를수록 말이 없어지고 숙연해졌다. 지형이 주는 위압감 때문인지 아직도 분단되어 있는 현실이 느껴진 건지.

 

구불구불 오르고 내리며 20여km를 가니 드디어 저 멀리 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뙤약볕이지만 걸어서 다리를 건너보기로 했다.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저 아래 물이 보인다. 몇 걸음 걸어갔는데 등에 땀이 줄줄 흐른다.

 

이 댐은 상류 지역에 급격한 홍수 발생 시 하류 지역에 있는 댐의 안정성 확보와 홍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건설 되었다고 한다. 잠시  땀을 식히는데 ’비목공원‘이라는 작은 푯말이 보였다.

 

“1960년대 중반 평화의 댐에서 북쪽으로 14km떨어진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한명희라는 청년장교가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는 돌무덤의 주인이 전쟁 당시 자기 또래의 젊은이였을 거라는 생각에 <비목>의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장일남이 곡을 붙여 1970년대 중반부터 가곡으로 널리 애창되었다.”

▲ 아흔아홉 구빗길     © 임춘신

 

 

비목공원이 세워진 유래를 읽는데 울컥해지며 ‘아, 그 가사가 여기서 나왔구나. 지금 여기는 참으로 평화로운데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까?’

 

‘초연이 쓸고 간’ 이라면 총 끝에서 나오는 연기란 뜻이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 간이란 뜻인데! 입에 가사를 담다 보니 우리말이 정말 예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아름다운 가사를 쓴 청년장교는 국악인으로 현재는 대한민국예술원부회장을 맡고 있다.

 

뽀송뽀송한 하얀 구름과 시리도록 푸른 하늘, 짙푸른 나뭇잎. 티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이곳 산천에 푹 빠져든다.

 

공원에는 기념탑을 비롯하여 철조망을 두른 언덕 안에 녹슨 철모를 씌운 나무 십자가가 여러 개 서있다.  세월호의 노란 리본과 맞물려 젊은이들의 죽음이 가슴 아프게 전해져 왔다.

 

전쟁의 상처를 아직도 가슴 깊숙이 묻어 두고 있는 남편의 얼굴에도 슬픔이 묻어난다. 남편 나이 네 살에 6.25로 아버지를 잃고 동네는 모두 불타버렸다. 폐허가 된 동네에서 초근목피로 끼니를 대신하며 이를 악물고 다시 동네를 재건했다고 한다.

 

그 당시 전쟁의 흔적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경남 함안 가묘에 4발의 총 자국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온 동네가 잿더미가 되었지만 가묘 안에 있던 나무 상석은 반쯤 타고 꺼졌다고 한다. 조상님들이 끝까지 이 터전을 지키려 했었다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다.

 

그 믿음이 오늘을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자손들에게 그 때의 아픔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총 자국을 그대로 두고 있다. 그 총 자국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옷깃을 다시 여미곤 했었다.

 

요 며칠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한국에 왔다며 나라 안이 술렁거렸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역사적으로 참 친한 사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린 겉으로만 웃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상황을 복배수적(腹背受敵)이라고 표현했다. 배와 등 양쪽에서 적이 몰려드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정면이나 배후에서 기존 질서의 판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면 ‘끼인자’의 처지는 심각해진다. 최근 판을 바꾸려는 조짐이 보인다.”(조선일보)

▲ 비목공원 종탑     © 임춘신

 

‘끼인자’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을 키워야 함을 우리는 안다. 6.25전쟁은 우리끼리 싸우다 그 난리를 겪었고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싸우다 나라가 동강 잘렸었다. 

 

무심코 찾아간 평화의 댐 비목공원에서 세월이 지나 까맣게 잊혔던 아픔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후에 태어난 난 그 아픔을 말로만 들었지만 이곳에 와 보니 수많은 무명용사들이 죽어갔겠구나 싶어 명치끝이 아려왔다.

 

살짝 우울해진 마음을 풀고 더위도 식힐 겸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문다. 차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해지니 기분이 좋아진다. 지역 축제 안내판이 보인다. 산천어, 토마토, 쪽배 축제, 비목문화제 등 잔치가 즐비하다.

 

다행이다. 이제는 슬픔을 딛고 일어선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환한 웃음을 가득 선사했으면 좋겠다. 숨겨둔 슬픔의 응어리도 평화의 종소리에 사르르 녹아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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