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함께 한 친구, 멋진 사업가 되다

은행농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은행 가공 공장

이민선 | 기사입력 2014/09/08 [08:55]

스무 살 함께 한 친구, 멋진 사업가 되다

은행농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은행 가공 공장

이민선 | 입력 : 2014/09/08 [08:55]


 

▲ 두성은행     © 이민선


 

 

차창 속으로 스며든 바람이 머리칼을 어루만지듯 쓱 훑고 지나갔다. 상큼하다. 익숙한 냄새다. 고향 근처가 맞긴 맞나보다. 40년 지기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그런지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 하나하나가 정겨웠다. 향철 지붕을 한 작은 민가 뒤편으로 ‘영농조합 두성은행’이란 글자가 보였다.

 

다들 괴나리봇짐을 싸서 도시로 떠날 때, 그는 명절날 ‘역귀성’하듯 씩씩하게 고향으로 향했고 노부모와 함께 과수원을 가꾸며 꿋꿋하게 고향을 지켰다. 십 수 년 전 어느 날, 과수원을 그만두고 ‘은행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뒤 간혹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서로의 안부만 물었을 뿐 만남다운 만남을 하지 못했다.

 

“한번 꼭 놀러와, 올 때 미리 전화하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어쩐지 ‘언제 한번 밥이나 같이 먹자’는 영혼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가을바람 때문일까! 꽤 감성적인 편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래 꼭 갈게, 일삼아서라도 갈게, 아예 날짜를 정하지”하고는 정말로 날짜를 정해 버렸다.

가을이 시작된 9월 첫날 그가 있는 신양(충남 예산)으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은행 농가인줄 알았는데…은행 공장이네”

“그렇지? 몇 년 전에 시작 했어”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농부가 아닌 사업가로 변신해 있었다. 은행 가공업체 ‘두성은행’사장이다.

 

“근데, 왜 ‘두성’이지?”

“별 뜻 없어, 사업 시작할 때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 ‘두진이는 할 수 있다’란 의미로 ‘두성’이라고 지었어(그의 이름은 한두진이다)”

 

그 다운 이름이다. 그는 보통사람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파이팅과 끈질김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왜 하고 많은 과일 중에 하필 은행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그는 노란 은행잎을 참 좋아했었다. 스무 살 시절 그와 난 노란 은행잎 흐드러진 서울 거리를 참 많이도 걸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 한두진     ©이민선

 

“과수원 울타리 나무로 무엇을 심을까 고심하다가 은행나무를 심었어, 은행나무는 병충해가 없어서 농약을 안줘도 되고, 손이 갈 데가 전혀 없는 나무야, 심어 놓기만 하면 알아서 크고 알아서 열매를 맺지, 그게 은행과의 인연이야”

“그럼 사업은 언제부터?”

“은행을 따서 닦아놓으면 어머니가 장에 가서 팔았어. 킬로 당 5천 원 정도 받았는데, 어느 날 내가 나가서 파니까 7천원 주더라고. 노인이 팔 때와 젊은이가 팔 때가 다른 거지”

 

IMF로 온 나라가 초상집일 때 그는 성공 가도를

 

스무 살 시절 추억 때문에 은행 사업을 시작 한 건 아니었다. 그는 은행 판매 기준을 만들다가 은행사업에 뛰어들었다.

 

노인이 팔 때와 젊은이가 팔 때 가격이 다른 것을 보고는 무엇인가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상품등급에 따라 가격 기준을 만들어 주변 농가 은행을 수매하기 시작했다. 상품 질에 따라 등급을 나눠 일정한 가격을 매기자 너도나도 팔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IMF로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였던 97년. 그의 사업은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2000여 농가에서 생산한 은행을 수매해서, 당시 은행수매 전국 1위를 기록했다. 많이 들어올 때는 하루에 10톤 이상 들어왔다고 한다. 일정한 등급을 매겨서 제 값 주고 은행을 수매한 덕분이었다. 판로는 은행가공업체와 산림조합 등이었다.

 

98년엔 은행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예당상사(충남덕산)’를 차렸고, 3만평 규모 임야에 은행나무 1만 8천 그루를 심었다. 2001년에 상호를 ‘두성은행’으로 바꾸면서 은행을 크기에 따라 분류하는 은행선별기를 개발, 전국 은행농가에 보급했다.

▲ 발효용기     © 이민선

 

 

2003년부터는 이마트 등을 비롯한 대형매장에 입점을 시작했고, 2004년에는 청와대에 설 선물 세트로 납품하게 될 정도로 삼품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2005년에는 은행내피를 벗기는 기계인 ‘박피기’를 자체 개발 할 만큼 큰 성장을 이루었다. 

 

사람 일이란 게 늘 잘 될 수는 없는 법. 그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2004년부터 은행가격이 바닥을 치기 시작 한 것. 은행나무는 심어놓기만 하면 해마다 수확량이 느는데 반해 소비량은 경기침체로 인해 해마다 줄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수확을 아예 포기하는 농가가 속출했다.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했다.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건 은행효소다. 은행효소를 이용해 은행엑기스, 은행 분말 같은 가공식품을 만들었다. 2011년에 공장을 이곳 신양면 산 속으로 이전하면서 효소 제품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공장을 산속에 둔 이유는 은행을 발효시키는데 중요한 신선한 공기를 얻기 위해서다. 

 

현재 그는 3만평 규모의 임야에서 생산한 은행과 약초를 접목시켜 다양한 효소 제품을 생산중이다.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은행발효액 ‘징코청’과 ‘행리환’, 은행발효분말과 구절초 발효액 등이다. 앞으로 은행을 숙성시켜 만든 ‘은행발효차’를 생산 할 계획이라고 한다.

 

위기는 곧 기회, 불황 타개하기 위해 은행 가공식품 생산

 

가공 식품을 만들기 위해 그는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식품공장 찾아가서 진공포장, 살균, 발효시키는 방법 같은 거 배웠고, 산속에서 민간요법 연구하는 분들 찾아다니며 묻고 또 묻고…발품 많이 팔았어. 신성대학교, 공주대학교, 호서대학교, 동아대학교 등과 함께 은행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고…”

 

이렇게 해서 그는 은행이 인체에 유익한 많은 성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심장과 폐 기능을 강화시켜 주는 성분이 있어 천식 같은 기관지 환자에게 필요한 식품이란 걸 알게 된 게 큰 성과라고 한다.

▲ 선별기     © 이민선

 

 

오후 5시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언제 또 만날지 모르니 이번에 줄 수 있는 것 다 줘야 한다”며 큰 종이 박스를 건넸다.

 

그와 함께 했던 스무 살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참 빛나는 시간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난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NO'라고 할 것이다.

 

그와 난 푸른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한 처지였다. 그 땐 모든 게 궁했다. 배 불리 먹을 수도 없었고, 편안하게 잠들 곳도 없었다. 그 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 시간이 그래도 비참하지는 않은 건 스무 살이라는 찬란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 땐, 이십년 후의 모습이 참 궁금했다. 그 때 쯤 이면 인생의 성적표를 받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스무 살을 넘기면서 그는 고향으로 내려왔고, 난 서울에 남았다. 그와 나, 이제 사십대 중반의 나이. 그는 고향을 꿋꿋하게 지키는 멋진 사업가가 되었고 난 지금도 도시에서 촌뜨기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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